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융 (문단 편집) == [[프로이트]]와의 관계 == 처음엔 [[프로이트]]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났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친밀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 관련 논문[* 1900년 <꿈의 해석>, 1901년 '일상 생활의 병태 심리', 1905년 '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과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을 읽고 융은 크게 감명을 받아 공식적으로 프로이트를 지지하였다.[* 당시 프로이트의 평판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20세기 큰 획을 그은 위인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조촐한 유대 집안 출신이였으며 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외톨이 신세였다. "정신병은 여자만의 병이 아닌 인간의 병으로서 남자도 걸릴 수 있다"라고 발언 후 학계에서 파문 당하고 생활고에 빠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주류 의사와 동료학자들은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자 학계에서 명망있는 유명인과 학자들은 융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일갈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융은 모두 거절한 뒤 프로이트를 만나러 갔다. 둘은 만나자마자 13시간이나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편지도 자주 나눴다. 자연스레 뒷사정을 안 프로이트는 융에게 고마운 감정을 가졌을 것이고 프로이트에게 융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하고 제2인자로 융을 아들처럼 아끼고 늘 옆에 데리고 다녔다.[* 융의 친아버지는 융이 [[바젤 대학교]]에 입학 한 후 얼마있다 별세했다. 그래서 융에게 있어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실제로 둘은 부자관계처럼 보일 정도로 친밀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여행도 같이 갔었다. 하지만 미국 여행 이후에 사이가 나빠져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를 무너트리고 1인자의 지위를 빼앗아 갈 거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며 암시적으로 융을 경계했다. 융은 그 당시 프로이트는 자기 이론의 권력화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본인을 동일시하였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평소에 융에게 아버지로서 대접을 받았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융)에게 당할 (권력)살해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융이 프로이트의 꿈을 해석하려던 중, 그에게 사생활을 얘기해달라고 말하자 프로이트는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라고 거절했다. 융은 그 순간 프로이트가 그 말을 하며 스스로 권위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자서전 295p)], 서로 연락도 안 하더니 융이 프로이트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여행을 갈 때 두 사람은 '우리가 미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할 거다!'며 갔는데 스승이었던 프로이트는 일반석에 '''제자'''였던 융은 귀족층이 타는 '''1등석'''에 타고 갔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되었다.[* 제드 레벤펠드의 소설 살인의 해석에서 미국 여행을 온 지그문트와 카를 융이 왜 사이가 틀어졌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부정한다.[* 융의 자서전을 참고하면 프로이트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다고 한다.]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더 넓은 의미로서의 이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융은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프로이트를 비판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인데, 첫째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교조화하려 했고 그걸 융에게 암시적으로 부탁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는 것이었다. 이미 [[정신분석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프로이트가 융에게 후계자를 내외적으로 표했던 일화를 보면 당연한 사건이다. 둘째는 오로지 성(性)만으로 인간정신을 해명한다는 것이 융에게 있어서 불합리하게 여겨졌다는 것이었다.[* 자서전 중 "내가 프로이트의 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반에 널리 잘못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성은 내 심리학에서 정신 전체의 본질적인(유일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표현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주요한 관심은 성의 개인적인 의미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그것의 정신적인 측면과 신성체험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이론을 자기 학파의 핵심 이론으로 지켜야 한다 주장했으나, 융은 아니라고 보았고 결국 둘은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된다.[*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만의 진리에의 열망이 만들어낸 일이다. 융은 학자로서 권위와 명성보다는 진리를 추구했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산하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많이 갈라섰다. 말년에 프로이트는 융을 살짝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화''' * 어느날 융은 프로이트와 초심리학에 관한 논쟁을 펼쳤다. 그때 공교롭게 방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그러자 융은 "잠시 후 또 폭음이 나리라는 것을 지금 예고합니다"라고 말했다.[* 융이 말하길 "촉매에 의한 외면화 현상의 한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헛소리 하지마시오!"라고 말했다. 융이 다시 답하길 "잠시 후 또 폭음이 나리라는 것을 지금 예고합니다."라고 하며 프로이트의 두 눈을 계속 응시했다고 전해진다. (자서전(영문판) 289p)] 그리고 몇초 후 엄청난 폭음이 방 안에 또 울렸다고 한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아연실색하며 융을 바라보았고 융에게 유령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유령'이라는 단어가 유치하기 때문에 우스운 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융에게는 진지한 체험으로서 '[[동시성 현상]]'이라는 논문까지 만들었다.] 그날 이후 그 사건은 두번 다시 프로이트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시키기 위해 프로이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그의 과학적 이론화는 정신분석학의 사활이 달린 문제였기에 이런 사건들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얼마나 황당하고 소름이 돋는 얘기일지 짐작할 수 있다.] * 프로이트는 칼 융과 논쟁을 하면 자주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일로 1912년 뮌헨에서 정신분석학회가 열렸는데, 어떤 학자가 아메노피스 4세(이그나톤)에 관한 화제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그 요점은 아메노피스가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비를 모두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에 융은 개인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기렸다고 했다. 프로이트 눈으로 보기엔 '아버지의 기념석주 파괴 행위'를 옹호하려는 듯한 융이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논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실신했다고 한다. 융은 그를 부축하여 옆 방 소파에 뉘었다. 반쯤 회복한 프로이트가 융이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양 나약한 모습으로 융을 올려다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기억 꿈 사상 292p) * 브레멘에서 출발한 미국행 여행에서 서로 매일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꿈을 분석했다고 한다. 그러다 프로이트가 어떤 꿈을 꾸었다. 융은 그가 사생활에 관해 좀더 상세한 정보를 나에게 제공해준다면 꿈의 해석이 더욱 풍성해지겠다고 말했다. 융의 말에 프로이트는 갑자기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융을 째려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융은 반박을 해보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해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를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낸 유명한 일화다. 융은 자서전에서 이 사건 이후 프로이트와 결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직감했다고 언급한다.[* 융은 권위 찬탈의 두려움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임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또한 그 발언으로부터 프로이트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상실하게 했다고 서술했다. (기억 꿈 사상 295p)] 하지만 프로이트의 깊은 통찰과 폭넓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던 융은 그런 프로이트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한편으론 융의 성격상(극단적인 과학적 교조화에 대한 혐오, 지적 반항기질 등) 권위를 잃었지만 권력을 부리려는 연장자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